오다 스에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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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 스에마루는 덴도 번의 다이묘인 오다 노부미치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보신 전쟁 당시 형 오다 노부토시가 은퇴하면서 양자가 되어 가독을 이었고, 덴도 번 지번사가 되었으나 어린 나이로 인해 면직되었다. 이후 6세에 사망했으며, 도쿄도 분쿄구의 고린지에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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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스에마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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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 오다 씨 (노부카쓰 계통 노부요시 류) |
묘소 | 도쿄도분쿄구무코가오카의 고린지 |
생애 | |
시대 | 에도 시대 말기 - 메이지 시대 |
출생 | 게이오 2년 2월 20일 ((1866년4월 5일)) |
사망 | 메이지 4년 5월 9일 ((1871년6월 26일)) |
아명 | 스에마루 |
아버지 | 오다 노부미치 |
양아버지 | 오다 노부토시 |
형제 | 노부토시, 스에마루 외 6남 9녀 |
직위 | |
번 | 데와덴도 번 번주 |
막부 | 해당 없음 |
주군 | 해당 없음 |
관위 | 해당 없음 |
기타 | |
계명 | 해당 없음 |
신호 | 해당 없음 |
시호 | 해당 없음 |
2. 생애
오다 스에마루는 에도 시대 말기 덴도 번주 오다 노부미치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보신 전쟁과 메이지 유신이라는 격동기에 형 오다 노부토시가 은거하면서 아주 어린 나이에 가독을 이어받아 명목상 번주이자 판적봉환 이후 지번사가 되었다.[1]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나이를 이유로 지번사에서 물러나 형의 적자가 되었으며, 1871년 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분쿄구의 고린지에 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오다 노부미치(제2대 덴도 번주)의 여섯째 아들로 텐도에서 태어났다.1868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에 저항한 형이자 덴도 번주였던 오다 노부토시는 신정부로부터 영지 2천 석 몰수와 은거 명령을 받았다.[1] 당시 노부토시는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북부 제번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한 상태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노부토시가 은거함에 따라 당시 젖먹이였던 스에마루(당시 이름 쥬쥬마루)가 노부토시의 양자로 입적되어 가독을 상속받았다.
1869년 4월 2일 판적봉환이 실시되었고, 같은 해 6월 22일 스에마루는 덴도의 지번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 때문에 같은 해 7월 19일 지번사에서 면직되었고, 은거 중이던 형 노부토시가 다시 지번사 자리를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에마루는 노부토시의 적자 신분이 되었다.
1871년 5월 9일, 스에마루는 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정실과 자식은 없었다. 그의 묘소는 도쿄도 분쿄구에 위치한 고린지에 있다.
2. 2. 번주 지위 상실과 번지사 재임
오다 노부미치(제2대 덴도 번주)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메이지 원년(1868년) 12월 7일, 보신 전쟁 당시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북부 제번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던 형 오다 노부토시(제3대 덴도 번주)가 신정부로부터 2000석 영지 몰수와 함께 은거 명령을 받았다.[1] 당시 노부토시는 가택 연금 상태였다. 같은 해 12월 18일, 노부토시가 은거함에 따라 그의 양자가 된 스에마루가 가독을 이어받아 명목상 덴도 번의 마지막 번주가 되었다. 이때 스에마루는 아직 젖먹이였다.
메이지 2년(1869년) 4월 2일 판적봉환이 이루어졌고, 같은 해 6월 22일 스에마루는 덴도 번의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스에마루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같은 해 7월 19일 번지사에서 면직되었다. 대신 은거 중이던 형 노부토시가 다시 번지사가 되었고, 스에마루는 노부토시의 적자 신분이 되었다.
스에마루는 메이지 4년(1871년) 5월 9일, 6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했다. 정실과 자녀는 없었다. 그의 묘는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고린지 불교 사찰에 있다.
2. 3. 요절
메이지 원년(1868년) 12월 7일,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유신 신정부에 저항한 텐도 번주이자 형인 오다 노부토시가 영지 2,000석 몰수와 함께 은거 명령을 받았다.[1] 같은 해 12월 18일, 노부토시가 은거함에 따라 당시 젖먹이였던 스에마루가 양자가 되어 가독을 이었다.메이지 2년(1869년) 4월 2일 판적봉환이 이루어졌고, 같은 해 6월 22일 스에마루는 텐도 번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어린 나이를 이유로 같은 해 7월 19일 번지사에서 면직되었고, 은거 중이던 노부토시가 다시 번지사가 되면서 스에마루는 노부토시의 적자가 되었다.
메이지 4년(1871년) 5월 9일, 스에마루는 6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정실과 자녀는 없었다. 그의 묘는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고린지 불교 사찰에 있다.
3. 가계
오다 노부미치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형인 오다 노부토시(제3대 덴도 번주)의 양자가 되었다.
1868년 12월, 보신 전쟁 당시 메이지 유신에 반대하여 북부 제번의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담했던 양부 오다 노부토시가 가택 연금 처분을 받고 은거하게 되자, 아직 젖먹이였던 스에마루가 그의 뒤를 이어 제4대 덴도 번주가 되었다.[1] 그러나 1869년 7월, 노부토시가 덴도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고, 판적봉환 이후 번지사로 임명되면서 스에마루는 번주(번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1]
스에마루는 여섯 살의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며, 묘는 도쿄도 분쿄구에 있는 고린지 불교 사찰에 있다.
관계 | 이름 |
---|---|
실부 | 오다 노부아키 |
양부 | 오다 노부토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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